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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하고 7개월

8년하고 7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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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오늘을 기준으로 미국생활을 한번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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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 기약 없는 학생비자로 아내와 함께 3살 그리고 8개월된 두 아이를 데리고 텍사스 어스틴으로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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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 첫학기 부터 풀펀딩이라는 정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가족들도 부양해야 했고 또 한국에 두고 온 5만여불의 빚도 있었지만, 건강 하나를 허락해 주신 덕분에 원대한 목표를 품고 많은 일들을 해나갔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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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년만에 모든 펀딩이 날아갔다. 가진게 빚이라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를 펀딩을 기다릴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기에 그날부터 미국에 남을 수 있게 난생 처음으로 새벽기도라는 것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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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이력서를 몇개나 썼던가. 학교 취업박람회에서 스탠딩인터뷰를 보았고 며칠 후 온사이트 면접 그리고 2주 후에 고대하고 고대하던 오퍼를 받았다. 3만불짜리 잡이었어도 감사하게 생각했을텐데, 그땐 오일경기가 최정점이었을때라 대기업 부장 부럽지 않은 조건에 떨리고 설레고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받자마자 오퍼레터에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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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5월, 미국에서의 취업은 분명한 기도응답으로 생각했고, 목자님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영접을 하고 침례를 받았다.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정든 학생아파트를 떠났고, 휴스턴 에너지코리도어 내 작은 아파트로 우리가족은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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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16년, 오일개스산업의 다운스트림과 미드스트림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들에 대한 프로젝트 컨트롤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고, 좋은 리더십 덕분에 리스크분석 기술을 습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OPT 기간을 거쳐 취업비자도 승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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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는 오일가격에 많은 사람들이 레이오프되었지만, 그당시 맡고 있던 4.5조짜리 LNG 프로젝트는 이미 EPC 계약을 마친 상태라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도 중단되어 며칠 후 나 또한 레이오프를 당했다. 레이오프를 당한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적으로는 큰 마일스톤을 찍었던, 우리 부부가 목자목녀로 임명 받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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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영주권이 없던 상태라 바로 이직을 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정말 얼마나 많은 이력서를 넣었던가. 목자목녀로 불러주신데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 지역 안에서만 직장을 찾다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모르니 다른 지역도 지원해 보라는 한 목자님의 말씀에 아차 싶어 타주에 지원하니 그날로부터 전화면접이 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마침내 미시건과 워싱턴DC에서 온사이트 면접이 잡혔다. 특히 워싱턴DC에서 전화 온 회사는 참 독특했다. 전화면접을 보자마자 다음날 아침 일찍 워싱턴DC로 갔고, 공항에는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면접을 보는데 팀리더는 호버보드를 타면서 질문을 던졌고, 사장은 특유의 빠른 발음으로 굉장히 날카로운 기술질문들을 던졌다. 면접이 끝났고, 레이오프가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을 상황이었던 나에게 기존 연봉에 3%가 인상된 금액으로 그 자리에서 오퍼를 주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는 질문에 내가 3일 후부터 가능하다고 하니 사장님이 엄청 놀라워했다. 텍사스에서 워싱턴DC로 이주를 해야하는데 3일만에? 하지만 내겐 그만큼 절박했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2년 후, 이 직장은 정녕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장이란걸 깨달았고, 지금도 이 직장이 아니었다면 오늘 내 분야에 이만큼 자신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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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18일, 새직장에 첫 출근을 했다. 이제까지는 늘 건설회사의 일원이었지만, 이제는 건설회사와 발주처를 상대로 컨설팅을 해야하는 컨설턴트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클라이언트 사무실에 첫 미팅을 갔다. 나는 이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팀리더와 함께 갔는데, 팀리더의 미팅진행하는 모습에 넋이 나갔다. 나랑 한두살 밖에 차이 나지 않을 것 같은데, 팀리더는 순식간에 나의 넋은 물론 클라이언트들의 넋도 빼앗아갈만큼의 실력과 언변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제껏 내 분야에서는 나름 괜찮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한번의 미팅에서 나는 내 스스로 철저하게 겸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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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19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름 내 일에 대한 자신감도 얻었고, 이제는 랩탑 하나만 있으면 전세계를 누비며 컨설팅을 할 수 있는 실력과 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미국사람 100명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게 미팅을 리드할 수 있다고 생각될 즈음, 사장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사장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나에게 말했다. ‘Haegon, let me do my job.’ 나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이유인 즉슨, 나와 함께 일했던 몇명의 클라이언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클라이언트가 잘못된 방향으로 일을 이끌려고 할때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베스트프렉티스에 어긋난다는 둥의 내 실력만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선에서 해결해야지, 이런 사항들을 위에다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클라이언트를 통해 사장님 귀에 들어갔고, 급기야 나를 호출한 것이다. 사장님은 이렇게 이어 말했다. 김해곤이 해야할 일은 클라이언트에게는 항상 긍정의 대답을 해서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끔, 다시 일하고 싶게끔 하는 것이고, 만일 클라이언트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면 사장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그때 사장이 나서서 김해곤이 원하는 그 옳은 방향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Haegon, let me do my job.’ 참으로 멋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대리였을 때 발주처와 일이 좀 꼬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걸로 과장차장이 움직여야 하냐며 크게 혼이 났던 적이 있어, 난 내게 주어진 무슨 일이든 내 안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사장님과의 짧은 시간을 통해 나는 직장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고, 그 이후로부터는 나와 일했던 사람이 다시 나와 일하고 싶도록 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 회사를 통해 우리 가족은 영주권을 받았고,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비용은 회사가 부담했으며, 6개월마다 보너스에 연봉을 평균 4%씩 인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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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500억원짜리 프로젝트에 대한 컨설팅을 성공적으로 마칠즈음, 이제 다시 건설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직장에 면접을 보게 되었고, 5번의 전화면접과 2번의 온사이트 면접을 거쳤다. 이직하자마자 매주 아틀란타로 출장을 다니며 8천억원짜리 배터리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올해부터는 페이스북 어카운트에 풀타임으로 소속되어 4개 주의 데이터센터 캠퍼스들에 대한 프로그램 컨트롤 업무를 이끌고 있다. 토탈 컨트롤 밸류는 3조가 넘는다. 이직한지 4개월만에 보너스와 함께 연봉을 인상해주고, 모든 근무조건을 내가 최상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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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6일 오늘, 드디어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보았다. 오늘 아침 인사과로부터 시니어급 엔지니어 한명을 채용하는데 기술면접을 봐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늘 면접을 보기 위해 준비를 했지, 면접관으로서의 준비를 해본건 처음이었다. 지원자와 36분간 전화통화를 했고, 서로 긴장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에 혹시 궁금한 거 있냐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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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기약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지 8년 7개월이 지난 오늘밤, 그래도 나름 참 열심히 했노라고 스스로를 토닥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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